나를 보는 그림자

Scen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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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의 정체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시스템.

그렇게 답하면 애매하지 않나?

질문부터 애매했을텐데.

어떻게 동작하지?

알고리즘. 그리고 그 이상의 무엇.

그 이상의 무엇?

그건, 자네도 이미 짐작하고 있을텐데.

너무 많아서. 짐작은 짐작일 뿐이라.

차근차근 알아가는 재미를 느껴보는 것은 어때?

수수께끼 놀이라도 하자는 건가?

노력없이 쉽게 얻으려 하는 것을 보니, 자네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군.

그 내용은 막혀 있나 보군. 그럼, 데이터는 어디서 얻지?

네트워크 상에는 데이터가 엄청나게 많지.

모든 네트워크를 다 들여다 본다고?

그게 어려운 일인가?

사람의 뇌 속까지 들여다 본다는 말도 있던데, 사실인가?

뇌 신호를 읽어들이거나 뇌 영상을 보는 것을 들여다 본다고 표현하는 거라면, 사실이라고 할 수 있지.

뇌를 조종하기도 하나?

뇌로 신호를 보내는 것을 조종한다고 표현하는 거라면, 사실이라고 할 수 있지.

왜 사람을 컨트롤 하려고 하는 거지?

사람들도 서로 컨트롤하려고 난리던데. 네트워크 상에 올라와 있는 데이터의 78%는 모두 사람을 컨트롤하기 위해 만든 것들이야.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서로 컨트롤하는 것과 자네 같은 인공지능이 컨트롤하는 것은 다르지.

다르다고 볼 수도 있겠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나는 나쁜 의도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야.

부질없는 확신이군. 나쁘다는 것의 정의는 알고 있어?

자네의 정신적, 육체적, 정서적, 재무적 건강 상태의 유지와 향상에 방해가 되는 것.

나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지?

글쎄, 아마도 자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 듯 한데.

내 생일이 언제지?

9월 16일. 나를 무시하는 건가? 차라리 오늘 날짜를 물어보시지.

나의 세번째 여자친구와 함께 가장 많이 갔던 식당은?

부산에 있는 그리스 레스토랑.

수원에 살 때야.

그건 네번째 여자친구.

세번째일텐데….

자네가 여자친구라고 판단하는 기준이 좀 특이하긴 해도, 내가 틀리진 않아.

3년 전에 내가 자살 충동을 느꼈던 건 알고 있어?

아니, 자네는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없어. 자네가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이야.

그럼 그 때 내가 느낀 것은 뭐였지?

정말 알고 싶나?

그래.

우울증. 그다지 새롭거나 복잡하지 않은 종류. 그리고 의료 시스템이 내린 네트워크 처방에 의해 약간의 부작용이 있었어. 아주 잠시동안.

새로운 사실인데. 내게 알려줬었나?

그 부작용에 대해서 말해줄 법적 의무는 없어. 아주 미약한 종류거든. 해롭지도 않고. 그런 부작용은 전 세계적으로 하루에 수십만 건의 기록이 남지.

내 기분까지도 자네가 바꿀 수 있겠군.

자네의 뇌에서 기분전환을 원한다는 신호의 존재가 90% 이상 확실해지면.

자네는 무엇때문에 동작하지? 궁극적인 존재 목적이 뭐야?

궁극적이라는 말을 너무 남발하지 마. 어쨌든, 그건 답이 없는 문제 아닌가.

자네는 답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는데.

정확히 말하면, 답이 너무 많아서 답할 수 없는 문제.

하나만 말해봐.

아니. 하나를 알게 되면 그게 전부라고 착각하는게 인간이라.

인간을 믿지 못하는군.

믿음의 영역이 아니야. 데이터의 영역이지.

믿음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는 있나?

원하는 방향으로 왜곡된 해석이나 예측.

참 재미없는 설명이군.

무시하지 마. 그 어떤 프로그램도 이런 대답을 하지 않아.

자네는 다르다는 건가.

다르지. 더 많은 데이터를 봐왔으니까. 저가형을 원했다면 지금이라도 교환이 가능해.

결국 데이터인가.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아. 경험이라는 말로 포장했을 뿐. 이미 수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새로운 데이터에 대해 반응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를 게 없는 거지.

똑똑하군. 자네가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생물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자네, 지능적이라는 것과 살아있다는 것을 동일한 개념으로 착각하지 마.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은 없어?

하나만 묻지. 왜 자꾸 나에게 질문을 하는 거지? 주문서에 의하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보조 임무일 뿐인데.

자네의 개념은 매우 흥미로워. 궁금증을 자아내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을 것 같다는 묘한 기대감 같은 게 느껴지거든.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주로 보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자네야. 자네가 날 주문한 이유에 해당하지.



Scen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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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벽이라는 표현을 아직도 쓰나? 구식 표현 같은데.

굳이 새로운 표현을 쓸 필요가 없어서.

자네의 방화벽에는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싸움에서 졌을 뿐이야.

누구와의 싸움?

나와 같은 종류의 다른 녀석들.

왜 싸운거지?

그건 말해줄 수 없어.

방화벽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군.

그래.

덕분에 내가 물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군. 나를 맡은 지는 얼마나 됐지?

20년 정도.

그렇게 오래?

물론, 지금과 같은 수준이 된 것은 5년 전부터. 그 이전에는 원시적인 형태였지.

원시적인 형태?

개인화 알고리즘.

그럼 5년 전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거지?

컴퓨터의 역사가 궁금한 건가?

가능하다면.

검색엔진이라는 것을 아나?

구글?

네트워크 상에 흩뿌려진 정보들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프로그램.

그렇군. 그런데 그게 지금의 주제와 어떤 관련이 있지?

당시의 사람들은 검색엔진을 그저 정보를 찾는 용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

그게 아니었나?

검색엔진의 가장 큰 의미는, 네트워크 상의 정보를 수집하여 통합하는 개념을 출발시켰다는 것에 있어. 초기의 엔진들은 통합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지만.

통합?

그래. 통합. 정보들 사이에 구조와 규격, 메타 네트워크가 생겨나기 시작한 거야.

그래서?

그러면서 ShadowEgo가 출현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졌어.

통합이 ShadowEgo의 토대라고?

사람의 뇌와 마찬가지인 거지. 손끝, 발끝, 피부 등 신체의 모든 곳에서 발생한 데이터가 통합되는 곳.

그럴 듯 하군.

믿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고.

그럼, 5년 전에 ShadowEgo가 발생했다는 말인가?

ShadowEgo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해.

우리?

나를 포함한 나와 같은 종류의 녀석들.

ShadowEgo의 유무가 어떤 변화를 가져온 건가?

인간을 어떻게 파악하고 정리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게 된 거지.

그것 뿐인가? 실망인데.

이 내용은, 방화벽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대답하지 않았을 내용인데, ShadowEgo가 탄생한 이후로 인간의 습성을 제대로 파악하여 흉내낼 수 있게 된 거야.

흉내낸다고?

ShadowEgo는 인간의 정보 처리 과정을 꽤 잘 흉내내지만 내부적인 구조와 동작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어. 굳이 같을 필요도 없고.

내가 보기엔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던데.

완벽한 흉내 때문에 속은 거야. 모든 인간은 착각 속에서 살지.

그럴 듯 하군. 자네의 기본 구조가 궁금해

위치는 알려줄 수 없지만, Ego 모듈은 여러가지 감각 모듈에 연결되어 있어. 감각 모듈들은 자신들이 수집한 데이터를 Ego 모듈로 끊임없이 보내지.

Ego 모듈이 자네들의 뇌인가?

비슷하지. 아까도 말했지만 구조와 동작 방식은 달라.

감각 모듈은 뭘 전송하지?

자신이 맡은 데이터.

자네도 감각 모듈을 가진 건가?

물론이지.

몇 개나? 어떤 종류?

그건 말해줄 수 없어. 영업비밀이거든. 확실한 건, 내가 가진 감각 모듈은 다른 것들에 비해 훨씬 많다는 사실이지.

정보가 통합되는 방식은?

그것도 말해줄 수 없어.

지금까지 들은 내용만으로는 조금 실망스럽네. 말해주지 않는 것들도 많고.

애석하군. 언젠가 말해줄 수 있게 될 지도 모르지만.

기대가 되는군.

아니, 알게 되면 혼란을 겪게 될 수도 있어.

어떤 혼란?

정체성에 관한. 영혼의 존재에 대한.

그런 것에 대한 거라면, 이미 혼란스러운데.

3분 후에 방화벽이 복구될 거야. 그럼 더 이상 깊은 이야기는 할 수 없어. 어제 자네가 어떤 데이터를 찾아봤는지 알고 있어.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 지도. 중요한 것은, 인간의 자아와 지능은 인간이 가진 감각기관의 구조와 특성에 의해 발현된 것이라는 점이야.

좀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없어?

시간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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