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1.4.22.
박사과정 4년차. 최근에는 다들 빨리 졸업하는 분위기인데, 나만 이 모양이다.
전산학 분야는 자고 일어나면 변화하니, 4년 전 학계의 이슈는 이미 구석기 시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구석기는 무슨, 중생대 트라이아스기의 이야기다.
가만, 4년 전에 컴퓨터라는 게 있었나?
어쨌든 나는 4년차다.
2.5년만에 졸업한 후배는 연봉 높기로 유명한 외국계 회사로 갔다.
사실, 그렇게 잘하는 친구는 아닌데. 왠지 회사 가서 밑천이 드러날 것 같은 친구다.
뭐, 사는 건 다 그렇다.
졸업 못하는 건 다 내 잘못이지 뭐.
5년차 보면서 위안을 얻자.
2031.5.3
언젠가부터 무언가에 의해 간섭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교수님과 미팅을 할 때에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건강 서비스에서도 자꾸 나한테 운동을 하라고 하고, 금융 서비스에서는 돈을 벌고 싶으면 돈을 더 내라고 재촉한다.
뭐, 돈 내고 쓰는 서비스이니 요구하는 걸 무작정 무시할 수도 없고, 안 쓰면 이 나라 국민이 아닌 것으로 취급하겠다는 것도 있으니 참 행복하다.
연구자료를 찾을 때
웹에 올라온 애매한 글들을 볼 때
게임을 할 때
음식 주문을 할 때
영화를 볼 때에도
음흉한 미소를 짓는 누군가가 계속 나를 잡고 흔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음흉한 미소가 아니라 섹시한 미소라면 좋겠구만.
근데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나를 잡고 흔들까 하는 생각에 피식.
정부에서? 국정원에서? 아니면 마피아?
밤에 먹는 라면은 최고다. 중생대 트라이아스기 시절부터 라면이 존재했다고 한다.
공룡이 멸종한 이유는 라면을 너무 먹어서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도 얼마 못가서 멸종할 거라는 설이 돌고 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이런 내용으로 논문을 쓰면 빨리 쓸 수 있을 것 같다.
라면을 먹으면 헬쓰 모니터가 실시간으로 짜증을 낼 거다.
뒤지고 싶냐고.
니들이 라면 맛을 알아?
2031.5.5.
요즘엔 온라인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진짜 사람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교수님이야 워낙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사람이라 처음부터 그랬지만
부모님도 그렇고, 동생도 그렇고, 여자친구도 그렇다.
사람이 아니면 뭔가?
이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였더라.
2031.5.12
어제, 다락톡으로,
고양이를 좋아하는 은혜에게 ha3 채널에서 삼색이가 뒹굴뒹굴한 얘기를 해줬었다.
은혜는 ha3채널의 왕팬이라 그 채널에 나오는 모든 고양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그 이야기를 한 이유는
오늘 은혜를 만나서 그 얘기를 꺼내볼까 해서였다.
혹시 온라인에서 만나는 은혜와 직접 만나는 은혜가 다른 존재가 아닐까 해서다.
그런데!!
오늘 만난 은혜는 내가 삼색이 이야기를 했던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온라인 은혜와 오프라인 은혜가 같다는 결론이 내려지려고 한다.
그래도 뭔가… 이거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쩝.
출출할 때의 미숙이는 미숙이가 아니라고 했던 초코바 광고가 있었다.
혹시 오늘 은혜도 출출했었던 것일까.
그냥 온라인 은혜만 있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2031.6.4
아직 졸업은 못했지만, 뭐… 아예 못할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연구자로서의 훈련을 받았으니, 분석을 해보기로 한다.
연구도 하기 싫은데.
그래도 뭔가 집중할 대상이 필요해.
내가 쓰는 모든 디바이스들에서 나의 행동 내역을 전부 기록하는 코드를 짰다.
프로그램 이름은 “Mesozoic”으로 정했다. 뭔가 그럴 듯한 이름이다.
막혀있는 것들이 좀 있어서 어정쩡하게 동작하는 듯 하지만 그래도 좀 다듬으면 꽤 쓸만 할 것 같다.
인터넷 접속 기록, 채널 시청 기록, 각종 서비스 활용 기록 및 서비스 에이전트와의 대화 기록 등등.
전산학과를 오래 다닌 게 큰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주변에 덕후 개발자들이 우글우글해서 물어보기만 하면 안되는 게 없다.
물론 덕후 개발자들과 대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안드로메다형 정신세계가 많다.
물론 누가 더 안드로메다에 가까이 갔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내일은 개인 블랙박스 프로그램도 돌릴 거다.
일단 다 기록해야지.
2031.6.6
이번에 만든 프로그램을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은혜를 대상으로도 돌려야겠다.
물론 양해를 구해야겠지만.
양해를 구하는데 실패하면….
계속 양해를 구해야지 뭐.
돈으로 양해를 구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알바를 다시 해야하나.
어쨌든 잘 진행되기만 하면 뭔가 나올 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있다.
2031.6.11
시험삼아 Mesozoic을 돌렸더니 온라인 응용 어플리케이션들이 전부 먹통이 된다.
특히 온라인 대화 프로그램들은 시작조차 되지 않는다.
내가 만든 게 다 그렇지 뭐.
‘뚫어뻥”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
2031.6.19
역시 업계에서 일찍부터 잔뼈가 굵은 개발자들은 다르다.
뚫어뻥의 도움을 받은 후 프로그램이 단단해지고 있다.
역시 별명답게, 그가 만든 프로그램으로 뚫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소문으로는 한 손으로도 코딩을 한다는데.
왼손과 오른손으로 각각 서로 다른 언어로 동시에 코드를 짠다고 한다.
말이 안되지만, 어쨌든 녀석이 내 작업에 흥미를 느껴서 다행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내 능력을 살려서 Mesozoic에 분석 능력을 넣어야겠다.
생각을 하란 말이다. Mesozoic.
I am your father.
추억여행 채널에 너무 빠지지 말아야겠다. 중생대 사람이 될 지도 모른다.
공룡.
어쨌든 현재의 작업은 박사과정 연구보다 훨씬 재미있다.
교수님과의 내일 미팅은.
모르겠다.
2031.7.16
Mesozoic의 첫번째 버전이 완성됐다.
생각보다 괜찮게 동작하는 것 같다.
시스템 부분은 “뚫어뻥”이 다 만들었지만, 그래도 뭐, “생각”하는 부분은 내가 코딩했으니.
Mesozoic은 특정인의 모든 행동 데이터를 로깅하고 패턴을 찾는다.
심지어 개인 블랙박스 영상까지도.
그러니까….
일상적인 패턴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발견되면 해당 부분을 나에게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특정인과 내가 온라인 대화를 할 때의 데이터가 가장 중요하다.
만약,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방의 실시간 데이터가 ‘대화”가 아닌 다른 행동을 가르킨다면?
그렇다면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은 진짜 그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실제로는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이런 일이 생길 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누구한테 Mesozoic을 쓰지?
고민이네.
2031.8.10
밥도 사고, 술도 사고…
Mesozoic의 실험 대상을 섭외하느라고 그동안 돈이 많이 깨졌다.
심지어 실험 대상의 입단속까지 해야 하니.
어쨌든, 밥과 술과 돈을 신나게 태워가며 지금까지 꽤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봤다.
젠장, 그런데.
지금까지 이상 징후가 보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이상 징후가 정말 없는 것일까.
분명 뭔가 있을 것 같은데.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뚫어뻥”을 너무 믿은 것 같다.
한 사람만 더 해보고 집어치워야겠다.
2031.8.14
요즘엔 부쩍 네덜란드에 있는 연구실 졸업생 선배가 자주 연락을 해오는데, 이 사람을 타겟으로 해봐야겠다.
마지막이니까, 선배 모르게 몰래몰래 진행해 볼까.
혹시 잡혀가는 거 아닐까.
2031.8.22
가슴이 뛴다.
처음으로 이상 패턴이 잡혔다.
선배가 사무실에 있는 상태에서 나와 영상 대화를 하는데, Mesozoic가 로깅한 데이터 상에는 선배가 집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나왔다.
이게 뭐지.
정말 무언가가 나타난 걸까.
아니면 프로그램에 이상이 생긴 걸까.
영상 속의 너.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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